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이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스티브 잡스만큼 인문학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합니다. 일단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고, 그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효용가치를 스티브 잡스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하는 인문학과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이 동일하다는 전제이지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인문학은 전통적으로 문사철, 즉 문학/언어, 역사, 철학을 말합니다. 그럼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은 무엇일까요? 통상 영어로 liberal art나 humanities를 인문학으로 번역하고 있긴 합니다만, 스티브 잡스가 그 단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 제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 마음을 헤아릴 수야 없겠지만 잡스가 직접 했던 말에서 짐작을 해보는 것이 가장 근사치가 아닐까 싶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소위 인문학을 언급한 부분을 보자면, 세간에 공개된 것은 두 군데가 대표적인데요, 약간 의미 사용이 다릅니다.

첫번째는 최근 발견된 잃어버린 인터뷰(Lost Interview)에서 언급되는 부분으로 젊은 시절의 스티브 잡스(1995년도)가 프로그래밍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인문학(liberal art)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특히 이 부분인데요,

So I view computer science as a liberal art. ... It should be something that everybody learns, you know, takes a year in their life, one of the courses they take is, you know, learning how to program.

그래서 저는 전산학을 교양으로 봅니다. ... 그건 모든 사람이 배워야하는 것이고요, 뭐, 살면서 일 년 걸려 들어야 하는 수업 중 하나로,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죠. (번역은 김창준)


잡스는 이 인터뷰에서 컴퓨터 사이언스(잡스가 이 맥락에서는 프로그래밍과 같은 말로 쓰는 듯 합니다만 전산학자들은 프로그래밍과 전산학을 구분합니다)를 교양 과목 수준에서 모두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인문학(liberal art)은 그냥 교양이라는 정도의 번역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특별히 문학, 역사, 철학을 지칭하고 있지 않습니다. 문사철을 공부한다고 잡스가 말한 프로그래밍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두번째 부분은 비교적 많이 알려진 부분으로 2011년 제품 발표회의 한 장면입니다. 폴라로이드사의 공동설립자인 에드윈 랜드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히 드러납니다(자세한 내용은 월터 아이작슨의 잡스의 전기에 나옵니다).



... it’s technology married with liberal arts, married with the humanities that yields us the result that makes our hearts sing. ... they are talking about speeds and feeds ... that is not the right approach to this. ... even easier to use ... even more intuitive ... the s/w and the h/w and the applications intertwine in an even more seamless way ...

... 그것은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으로, 우리 가슴이 노래하게 하는 결과를 내주는 인문학과 결합하는 겁니다. ... 그 사람들은 속도와 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그것은 이런 일에 바른 접근법이 아닙니다. ... 훨씬 더 사용하기 쉽고 ... 훨씬 더 직관적이고 ...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애플리케이션이 훨씬 더 매끄럽게 엮이고 ... (번역은 김창준)


그가 생각한 인문학(liberal arts, humanities)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속도와 양에 신경 쓰는 것에 비해 제품을 더 쓰기 쉽고 직관적으로 만들고 총체적 경험을 만들 수 있는 매우 실용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단순히 역사나 철학, 문학을 공부한다고(혹은 기술 배우고, 역사나 철학을 배워서 서로 버무린다고) 이런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이런 일을 날마다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인문학 논쟁의 김희원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는 컴퓨터를 공부한다고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백 번 양보해서 잡스와 저커버그가 ‘천재’라고 가정하더라도 천재들과의 경쟁에서 취할 전략은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통한 번뜩이는 아이디어여야 한다. 이는 인문학 없이 나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삼성전자에서 인문학 전공자들을 대거 채용한 점은 오히려 기업이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인문학이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일견 스티브 잡스의 말과 일치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인문학과 "사용자에 대한 이해"는 현실적으로 거리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공부한다고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할 때 컴퓨터를 공부하는 것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잡느냐에 따라 또 다른 말이 될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말한 더 쓰기 쉽고, 더 직관적이며 총체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전문성 연구에 따르면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다른 (심지어는 인접)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분야 한정성)이 거듭 밝혀졌습니다. 세계적인 생물학 전문가가 물리학에 대해서는 초보 수준이라든가 말이죠. 하지만, 과거에는 사람들이 다르게 생각했고, 예컨대 라틴어 같은 것을 훈련하면 전반적인 사고 능력이 향상된다고 믿어서 그걸 배우고 가르쳤죠. 하지만 여러 연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문학, 철학, 역사에 밝다고 사용하기 쉬운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야는 통상 UX(사용자 경험, User Experience)라고 부르는 매우 전문적 분야로 오랜 기간의 공부와 수련을 필요로 합니다. 신선한 착상으로 해결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애플에서도 역사, 철학, 문학 전공자를 뽑아서 저런 일을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궁금한 사람은 애플 구인 페이지에서 직무설명을 검색해보시길 권합니다. 예를 들어 Philosophy, Literature, History 등으로 검색했을 때 소위 인문학으로서의 그런 주제를 언급하는 직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컨대 사용자 경험 설계자의 구인 직무 설명을 보시죠(2015/3/4 현재 시점. 향후 사라질 수 있음).


Description

...
Researching UI design and development techniques to find innovative and elegant solutions to complex UI problems
Designing application user interfaces (including information architecture and interaction design)
...

Education

BS or MS in Human Computer Interaction, Human Factors, Information Science, Graphic Design with emphasis on UI design, or Computer Science with emphasis on UI development


직무

복잡한 UI 문제를 해결하는 혁신적이고 우아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UI 설계와 개발 기법을 연구한다
애플리케이션 UI를 설계한다 (정보 아키텍처와 인터랙션 설계를 포함)

교육

인간 컴퓨터 인터랙션(HCI), 인간공학, 정보 과학, UI 설계에 중점을 둔 그래픽 디자인, UI 개발에 중점을 둔 전산학에서 학사나 석사 학위

(원문 링크. 번역은 김창준)


자기 회사의 DNA에 기술과 "Liberal Arts"의 교차점이 있다고 하는 애플 조차도 인문학 전공자를 별도로 뽑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김희원씨가 언급한 삼성에서 인문학 전공자를 "대거" 채용했다는 부분은 잡스의 말을 지나치게 해석해 벌어진 해프닝일 수 있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렇게 뽑은 인재들에게 결과적으로 무슨 직무를 맡기고 있냐 하는 부분이 되겠죠.

저는 이 글을 통해 인문학의 가치를 깎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잡스가 더 좋은 제품을 만들려면 문사철을 한 인문학자를 뽑아야 된다는 수준의 이야기를 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확대 해석이라고 생각이 드는군요. 그가 통상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이야기할 때 그 맥락에서 "기술"은 성능과 기능 중심 사고로, "인문학"은 그 외적인 것, 편의성이나 심미성, 일상적 경험 속에서의 긴밀한 결합 등에 대한 추구 정도로 보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김창준
by 애자일컨설팅 | 2015/03/04 13:34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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