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agile methodology(애자일 방법론)란 말에서 agile의 번역어로 "기민한"을 택했습니다. 아마 수년전 제가 잡지에서 그렇게 처음 번역해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맘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할 때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기민한"이라는 표현보다는 "애자일"이라는 소리 표기를 더 즐겨 쓰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의 이름도 "기민한 이야기"가 아니라 "애자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애자일은 날쌔다. 글을 요약하자면 agile의 번역어로 "기민한"을 택한 것은 잘못한 일이며, 날쌔다 같은 쉬운 순우리말 표현을 썼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 글의 이면에, 우리 사회가 좀 더 쉬운 말로 일관된 언어 생활을 했으면 하는 아름다운 욕구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부분을 충분히 존중하고 또 공감합니다. 저 역시 글을 쉽게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제 글들에 대해 "쉽게 쓰였으면서 울림이 있다"는 평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반적으로 그 글의 근저에 깔린 의견과 욕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또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글을 한 번 주욱 읽었습니다. 멍청하다, 바보짓이다, 어리석다는 등의 날카로운 말들이 콱콱 가슴을 찔렀습니다. "아직도, 중국에서 우리에게 事大를 하지 않는다고 멀쩡한 처녀들을 잡아다 바치라고 할까 걱정이 되는가?"는 과격한 표현까지 있는 걸 보면 글쓴이가 격앙된 상태에서 글을 썼다는 생각도 듭니다. 억울하고 섭섭했습니다. 결국 저 글의 화살은 저에게 향해 있다고 봅니다. 제가 agile을 "기민한"으로 번역한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적 허영에 빠진 사람, 번역에 대해 원칙이 없는 사람, 언어 생활에 대해 인식이 없는 사람마냥 비치는 것은 정말 억울하고 섭섭합니다. 저는 제대로 번역을 하기 위해 고된 훈련을 한 사람이며, 그래서 제 자신의 번역물에 대해 자부심이 있고, 다른 분들이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글쓴이가 누구인지 봤더니, 김재우님이시더군요. 평소 마소 등을 통해 익숙하게 보아왔던 필자이고 제가 번역한 실용주의 프로그래머에 추천사를 써준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다는 얘기를 작년 이맘때쯤 아는 사람으로부터 들은 듯하다. 애착이 가는 책이니만큼 누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그 동안 무척 궁금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앞섰다. 그러다 얼마 전에 ‘추천의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덕분에 원고를 받아서 두어 번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동안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번역이 꽤 좋았다.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만했다. --김재우 좋은 감정을 갖고 존경하던 분인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니 더더욱 억울하고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나름 변명과 항변을 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니 괜한 딴지 부리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까지 직접 충고를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그래도 글의 본의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우선 다음 인용글을 보도록 하죠: Agile이 그렇게나 어려운 뜻이라서 '機敏스럽기'까지 한 말인지 생각 좀 해보자. 위 주장의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특정 단어의 사전 뜻풀이가 쉬우면 그 단어는 쉬운 단어이다. 그런데, 쉽다 어렵다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번역하는 사람은 당연히 원본 언어의 표준적 사용자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맥락과 상황에 따라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나, 원본 언어 사용자에게 쉬운 단어는 목표 언어 사용자에게도 쉬운 단어로 번역하고, 어려운 단어는 어려운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번역의 기본이고 정석입니다. 왜냐하면 번역에 있어 축어적 일치성보다 맥락적 일치가 우선시 되기 때문이며, 이 맥락적 일치라는 것은 메세지와 수신자 간에 존재하는 반응의 체계를 번역해야 이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A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말 자체를 번역할 것이 아니고, 해당 언어의 수신자에게 A라는 말이 불러 일으키는 전반적 반응을 번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번역과 해석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나이다와 타버의 "번역의 이론과 실제"에 잘 나오는데, 국내에는 <도올논문집>에 일부가 번역되어 실려있고, <도올논어(1)> 144쪽부터 쉽고 간략한 설명이 있습니다. 번역을 하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예를 들어, 유감스럽다는 말을 무존건 쉽게 번역한다는 원칙에서 미안하다로 번역해 버리면 문제가 되는 상황이 굉장히 많습니다. 제 외사촌 동생이 초등학교 2학년인가 그랬을 때였습니다. 제가 물었죠. "공부하기 어떠니?" 그 친구가 답했습니다. "평이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들 웃습니다. 그런데 "평이해"를, "Easy"로 번역해 버리면 웃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애초의 문제는 네이버 영영사전은 원단어가 쉬운지 어려운지 판단에서 기준으로 삼을 자료가 못된다는 점입니다. 어학 사전은 크게 보아, 외국인을 위한 사전과 모국어 사용자를 위한 사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외국인을 위한 사전은 모든 단어를 설명할 때 기본이 되는 몇 가지 단어 한도 내에서만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모든 뜻 풀이가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네이버의 영영사전은 콜린스의 외국어 학습자를 위한 영영사전입니다. 따라서 네이버 영영사전의 뜻풀이를 보고, 그것이 쉽기 때문에 그 단어가 쉬운 단어라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오류입니다. 애초에 모든 단어를 쉽게, 또 성글게 풀어쓴 사전이기 때문입니다(초등학생용 국어사전이나, 외국인을 위한 학습용 국어사전을 상상하십시오). 원래 agile이라는 단어는 영어에서 그다지 쉬운 단어가 아닙니다. SAT나 GRE급(각기 대학 입시, 대학원 입시)의 단어입니다. 아마도 영미권의 초등학생 중에 agile이란 단어를 익숙하게 쓰는 사람은 10%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은 잽싸다, 재빠르다, 날쌔다는 말을 쉽게 사용하고 있을 것입니다. 기민(機敏)이라는 글은 한자능력검정시험에서 2급이면 한자로 읽고 쓸 수 있습니다. 2급은 대상 기준이 대학생 및 일반인입니다. "기민한"이란 말이 그렇다고 아주 어렵고 희귀한 단어도 아닙니다. "기민한"으로 뉴스 검색을 해보면, 매체에서 지난 주에 10번도 넘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비판글의 말대로 "기민한"이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뒤적거려야 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국어실력이 부족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외국인을 위한 학습용 사전이 아니고, 미국 본토의 대학생들이 많이 쓰는 사전 중 하나인 MWCD(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에서 agile을 찾아보도록 하죠. 1 : marked by ready ability to move with quick easy grace <an agile dancer> 비판글에서 권하는 "날쌔다"로 옮기기에는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특히 2번을 같이 담아야 한다면 날쌔다는 부적절합니다. 많은 사전에서 agile의 두 번 째 의미로 정신, 사고가 빠르다는 뜻을 넣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 비판글의 저자가 인용한 첫번째 뜻만 옮겨서 날쌔다라고 해버리면 두번째 뜻은 담기가 어려워 집니다. 우리말에서 "머리가 날쌔다"는 표현은 안쓰기 때문입니다. 반면, 기민하다는 말은 정신에 대해서도 쓰는 말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의 "기민하다"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예문이 있습니다. 그는 우둔한 외모와는 달리 놀랄 만큼 머리가 기민했고 상황 판단도 누구보다 정확했다.≪홍성원, 육이오≫) 특히 "機"라는 한자는 상황에 따라 재빠르게 뭔가 할 수 있다는 빠른 대응력의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敏"은 빠르다는 뜻인데, 머리 회전이 빠르다는 뜻으로도 씁니다. 이런 의미는 굳이 기민의 각 글자가 무슨 한자이고 무슨 뜻이 있는지 몰라도, 다른 연관어들을 알고 있으면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민에서 기는 기동성이나 기회, 계기의 기와 같은 글자일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고, 기민의 민은 영민, 명민, 예민하다는 말이 연상됩니다. 따라서 각 한자의 뜻을 몰라도 우리말 사용자라면 당연히 기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각 글자의 느낌이 버무려진 어떤 심상을 갖게 됩니다. 원래 agile이란 단어에는 단순히 동작이 빠르다는 것보다, MWCD 정의의 "ready ability"란 부분에서 보듯이 외부 자극에 대해 빨리 대응할 수 있다는 뉘앙스가 있는데, agile methodology에서 추구하는 것이 외부 조건 변화에 대한 기민한 대응입니다(우연찮게도 우리말 "기민한"은 "대응"과 연어 관계입니다). agile은 단순히 개발을 빨리 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름으로 agile이 아니고 fast나 quick, rapid 등을 골랐더라면 철학과 이름이 서로 맞지 않았을 뻔 했습니다. agile이, 단순히 빠르다는 것이 아니고, 여차하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 그리고 단순히 물질적 이동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도 쓴다는 점, 그리고 agile methodology가 외부변화에 따른 빠른 대응력을 뜻한다는 점, 또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는 비물질적인 과정을 말한다는 점 등으로 보아, 나는 agile을 "기민한"으로 번역했습니다. agile과 기민한이 비슷한 정도로 어려운(혹은 사용 빈도가 비슷한) 단어라는 점도 물론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제 글을 정리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비판글 말미에 정리하는 대목을 보죠: 다시 말하건대, 남의 말을 가져다 우리말로 옮겨 쓰는 까닭은, 모두가 쉽게 알아듣는 말로 좋은 배움을 다같이 나누려고 하는 짓이다. 한데, 옮기려는 말보다 옮겨 놓은 말이 더 어려우면 도데체 왜 그런 바보짓을 하는가? 여기에는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반대합니다. 각각에 대한 제 반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자어에 대한 제 입장을 밝히고 싶습니다. agile은 불어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기민하다는 형용사도 한자어에서 왔습니다. 영어 사용자에게 agile은 외래어이니 쓰지 말라고 하는 주장을 하면 어떤 반응을 할까요. 나는 한자어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민하다" 역시 우리의 소중한 언어 자산입니다. 애초에 agile methodology란 이름을 만든 사람들이 왜 agile이라는 비교적 어려운 단어를 택했을까요? 왜 quick이나 fast 같은 쉬운 단어를 쓰지 않았을까요? 앞서 말했듯이 뉘앙스와 미묘한 의미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이미 널리 쓰이는 단어들에는 새 의미를 덮어 씌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원래 비교적 어려운 단어를 고른 것을, 좀 더 정확한 번역을 위해 역시 비교적 어려운 우리 말로 옮긴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합니다. 비난의 화살을 쏘려면 agile이란 말을 애초에 고른 사람들에게 쏴야지요. 물론 agile이란 말을 고른 것이 옮은지 그른지 따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고 나는 지금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agile을 "기민한"으로 옮긴 것은 나름의 이유와 고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에는, 비판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機敏한'에 무에 그리 더 깊은 뜻이 담겨있"어서는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기민한"이란 말이 순우리말에 비해 더 멋있고 더 깊은 뜻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제가 골랐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은 오해이고, 나아가서는 제 번역 윤리에 대한 모욕으로 들립니다. 그나마 더 좋은, 더 정확한 번역이기 때문에 고른 것입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우리말로 옮겨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애자일"로 표기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참고로, 비판글에서 "차라리 소리나는 대로 에자일이라고 써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된 외래어 표기입니다. 국제 발음표기법으로 /ae/에 해당해서, "애"가 되지 "에"(/e/의 표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번역하는 사람으로서의 원칙을 지키고 싶었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물론 최고의 번역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 비판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김창준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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